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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주식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저는 기업의 매출, 영업이익, EPS, PER 같은 숫자만 잘 보면 투자 판단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반도체와 빅테크 기업들을 지켜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실적이 좋아도 정부의 규제 하나 때문에 사업 전략이 달라질 수 있었고, 반대로 시장에서 악재로 보던 정책이 수정되면서 투자심리가 빠르게 바뀌는 모습도 봤습니다. 특히 반도체처럼 국가 안보와 기술패권이 연결된 산업에서는 기업의 경쟁력뿐 아니라 워싱턴에서 어떤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중요했습니다. 그러다 미국 기업들이 정부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로비'라는 개념을 제대로 찾아보게 됐습니다.
미국의 로비, 우리가 생각하는 청탁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솔직히 저는 처음에 로비라는 단어를 들으면 뒷돈이나 청탁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부터 떠올렸습니다.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로비했다'는 표현 자체가 그런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제도를 찾아보면서 로비와 뇌물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미국에서 합법적인 로비는 기업이나 시민단체, 노동단체, 각종 이해집단이 정부와 의회에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정책 의견을 전달하는 활동입니다.
이를 제도적으로 관리하는 대표적인 법이 1995년 제정된 Lobbying Disclosure Act, 흔히 LDA라고 부르는 로비 공개법입니다.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로비 활동은 등록하고 이후 활동내역을 공개해야 합니다. 2007년에는 Honest Leadership and Open Government Act를 통해 공개 및 윤리 규정이 더욱 강화됐고, 현재는 로비 활동에 관한 분기별 보고서를 미국 상원의 공개 데이터베이스에서 직접 검색할 수 있습니다.
실제 LDA 보고서를 열어보면 단순히 '이 회사가 로비했다' 정도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기업이나 단체가 고객인지, 어느 분야의 정책을 대상으로 활동했는지, 어떤 의회나 연방기관을 접촉 대상으로 신고했는지, 신고된 로비 비용이 어느 정도인지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자료를 봤을 때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기업과 정부의 관계가 상당 부분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기업이 워싱턴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있는지를 투자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LDA에 특정 법안이나 정책이 적혀 있다고 해서 해당 기업이 그 정책을 찬성했는지 반대했는지가 항상 명확하게 적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보고서 제목과 비용만 보고 기업의 의도를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 로비 주체는 기업뿐 아니라 시민단체, 노동단체와 각종 이해집단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 미국 연방 로비 활동은 LDA에 따라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등록과 공개 대상이 됩니다.
- 분기별 활동보고서를 통해 정책 분야, 기관, 비용 등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보고서만으로 기업이 특정 정책에 찬성했는지 반대했는지를 단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출처: 미국 상원 Lobbying Disclosure Act 공개 데이터베이스
엔비디아를 보면서 로비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제가 로비와 기업가치를 실제 투자 관점에서 연결해서 보게 된 계기는 엔비디아였습니다. 2022년 이후 미국은 첨단 AI 반도체와 관련 장비가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제한하는 수출통제를 단계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AI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동시에 중요한 중국 시장에 판매할 수 있는 제품의 성능과 종류가 정책에 의해 제한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문제를 미국 정부가 결정하면 엔비디아가 그대로 따라야 하는 일방적인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젠슨 황 CEO는 미국 정부 관계자들과 지속적으로 만나 중국 수출통제와 AI 산업 경쟁력에 대한 회사의 입장을 전달해왔습니다.
특히 그는 지나치게 강한 수출 제한이 오히려 중국 기업들의 자체 반도체 개발을 촉진하고 장기적으로 미국 기술기업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공개적으로 주장해왔습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만나 수출통제 문제를 논의한 사실도 보도됐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후 정책 변화가 모두 엔비디아의 로비 때문에 발생했다고 단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도체 수출통제는 백악관, 상무부, 의회, 국가안보 당국, 중국과의 외교관계 등 수많은 변수가 동시에 작용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이 사례를 통해 제가 알게 된 것은 기업이 정부 정책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업은 정부가 규제를 결정하기 전후로 산업 데이터와 공급망 영향, 고용 효과, 경쟁국의 대응 가능성 등을 설명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책 결정자에게 전달합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이런 활동은 상당히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기업이 어느 규제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면 경영진이 현재 무엇을 가장 큰 사업 리스크로 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빅테크 기업들의 로비가 커지고 있을까
미국 로비 시장의 변화를 살펴보면 시대별로 중요한 산업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보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과거에는 자동차, 방산, 에너지와 같이 정부 정책과 직접 연결되는 전통 산업의 영향력이 컸다면 최근에는 아마존, 메타,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빅테크 기업들의 로비 활동도 상당히 커졌습니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됩니다. 지금의 빅테크 기업들은 단순한 소프트웨어 기업이 아닙니다. AI 규제, 개인정보보호, 반독점법, 데이터센터 전력, 반도체 수출규제, 노동정책, 세금 등 거의 모든 주요 정책이 사업모델과 연결됩니다.
특히 한 번의 규제가 세계 여러 국가에서 사업하는 플랫폼 기업의 수익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워싱턴 정책을 이해하고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기업 전략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1990년대 미국 정부와 대규모 반독점 분쟁을 겪은 이후 워싱턴 정책 대응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게 된 대표적인 기업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지금은 빅테크 전반에서 정부관계 조직과 정책 대응이 일반적인 경영 활동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저는 이런 변화를 보면서 미국 주식 투자에서 기업분석이라는 개념 자체가 과거보다 넓어졌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매출 성장률과 영업이익률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이 어떤 규제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기업가치를 판단하는 과정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로비 데이터로 주가를 예측할 수 있을까
로비 데이터를 처음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로비를 많이 하는 기업을 사면 되는 것 아닐까?' 저도 처음에는 특정 기업의 로비 비용과 주가를 연결해서 볼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자료를 확인해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로비 비용이 늘었다는 것은 기업에 좋은 정책이 나올 것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기업이 매우 심각한 규제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약회사가 특정 약가 관련 법안을 대상으로 로비 비용을 크게 늘렸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 기업이 새로운 정책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것인지, 반대로 기존 수익을 크게 훼손할 규제를 막기 위해 방어적으로 움직이는 것인지는 추가 자료 없이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로비 데이터를 투자에 활용한다면 절대 금액보다는 변화에 더 관심을 둘 것 같습니다. 평소 특정 정책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던 기업이 갑자기 같은 분야에 여러 분기 연속으로 로비 활동을 시작하거나, 경쟁기업 여러 곳이 동시에 같은 정책 분야에 집중한다면 업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정 산업 전체의 흐름을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반도체 기업 여러 곳이 동시에 수출규제와 관련된 정책 활동을 늘리고 있다면 투자자는 단순히 기업별 실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규제가 매출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추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장기간 축적된 LDA 데이터를 이용한 학술연구도 활발합니다. 실제로 MIT 연구자 등이 참여한 LobbyView 프로젝트처럼 수십 년간의 로비 데이터를 구조화해 기업과 정책 네트워크를 연구하는 데이터베이스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결국 로비 데이터는 매수·매도 신호라기보다 기업의 정책 리스크를 발견하기 위한 탐색 도구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LDA 데이터를 실제로 볼 때 제가 확인할 항목
미국 상원의 LDA 데이터베이스에서는 기업이나 로비 등록기관을 직접 검색할 수 있습니다. 처음 들어가면 자료가 복잡해 보이지만 투자자 입장에서는 몇 가지 항목만 먼저 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Specific Lobbying Issues입니다. 기업이 어떤 법률이나 정책 문제를 대상으로 활동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업 이름만 알고 있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정책 리스크가 여기서 발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House(s) of Congress and Federal Agencies입니다. 의회뿐 아니라 어느 연방기관을 대상으로 활동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 기업이라면 상무부, 통신기업이라면 FCC 등 사업과 직접 관련된 기관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비용의 변화입니다. 한 분기의 숫자만 보지 않고 최소 몇 개 분기를 나란히 놓고 보면 특정 정책 이슈가 갑자기 중요해졌는지를 판단하기가 조금 더 쉽습니다.
마지막은 반드시 기업의 사업구조와 함께 보는 것입니다. 매출 가운데 중국 비중이 높은 반도체 기업이 수출통제에 관한 활동을 늘리는 것과 중국 매출이 거의 없는 기업이 같은 분야를 신고하는 것은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로비 데이터를 재무제표를 대체하는 정보가 아니라 재무제표에 없는 부분을 확인하는 보조 자료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미국 기업의 로비 내역은 일반 투자자도 볼 수 있나요?
A. 네. 미국 상원의 LDA 공개 데이터베이스에서 등록된 연방 로비 자료를 무료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기업명, 등록기관, 로비스트, 정책 분야 등 여러 조건으로 검색할 수 있고 분기별 활동보고서 원문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Q. 로비 비용이 갑자기 증가하면 매수 신호인가요?
A.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만들기 위한 공격적인 활동일 수도 있지만 기존 사업을 위협하는 규제를 막기 위한 방어적인 지출일 수도 있습니다. 비용 자체보다 어떤 정책을 대상으로 활동하는지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Q. 엔비디아가 로비해서 중국 수출규제가 완화된 건가요?
A. 그렇게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젠슨 황이 미국 정부와 수출통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회사 입장을 전달한 것은 확인되지만 실제 정책 결정에는 국가안보, 미중관계, 상무부 판단 등 여러 요인이 동시에 작용합니다. 따라서 엔비디아가 정책 과정에 적극 참여했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Q. 한국 기업도 미국에서 로비 활동을 하나요?
A. 미국 정부와 의회의 정책이 사업에 영향을 주는 한국 기업이라면 미국 법과 신고요건에 따라 자체 조직이나 외부 전문회사를 통해 정부관계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여부와 규모는 기업별 LDA 자료를 직접 확인하는 편이 가장 정확합니다.
Q. 로비 데이터가 특히 중요한 업종은 무엇인가요?
A. 반도체, 제약·바이오, 방산, 에너지, 금융, 플랫폼처럼 정부 규제와 정책 변화가 기업의 매출이나 비용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업종에서 특히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미국 주식 투자를 시작했을 때 저는 기업이 좋은 제품을 만들고 실적만 잘 내면 결국 주가는 따라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기업의 실적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실적이 만들어지는 환경 역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반도체처럼 미국과 중국의 기술패권 경쟁에 직접 노출된 기업이나, 제약·방산·에너지처럼 정부 규제 하나가 사업구조를 바꿀 수 있는 산업에서는 정책을 이해하는 것이 기업분석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로비 데이터가 앞으로 오를 종목을 알려주는 비밀 지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기업의 경영진이 어떤 문제를 중요하게 보고 있는지, 어느 정책이 기업에 잠재적인 위험이나 기회가 될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보조자료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절대적인 로비 금액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몇 년 동안 거의 다루지 않던 정책을 갑자기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하거나 같은 산업의 여러 기업이 동시에 하나의 규제에 반응하기 시작한다면, 재무제표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변화가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 숫자는 기업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지만 정책은 앞으로 그 숫자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미국 기업을 분석할 때 저 역시 실적 발표 자료와 함께 LDA 공개자료를 한 번 더 확인하려고 합니다. 투자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를 가장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보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본 글은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를 권유하기 위한 내용이 아니며 미국의 로비 제도와 투자정보 활용 방법을 공부하며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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